칼럼/형사
'기억이 안 난다'와 '의식이 없었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김한솔 대표 변호사2026.09.08술자리 뒤에 일어난 일로 준강간이나 준강제추행 고소를 당한 분들은 대개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상대방도 걸어서 숙소에 들어갔고 대화도 했다는 것입니다. 고소인은 다음 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두 이야기가 모두 사실일 수 있다는 데서 이 사건의 어려움이 시작됩니다.
블랙아웃과 패싱아웃
형법 제299조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간음·추행을 처벌합니다. 알코올 블랙아웃은 의식은 있는 상태에서 기억이 만들어지지 않는 현상이고, 패싱아웃은 의식 자체를 잃는 상태입니다. 나중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순간 의식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블랙아웃이면 언제나 항거불능이 아니라는 뜻도 아닙니다. 대법원은 의식을 잃지 않았더라도 의사를 형성하거나 저항할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였다면 항거불능으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블랙아웃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대법원 2021. 2. 4. 선고 2018도9781 판결).
법원이 보는 요소
그래서 판단은 종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판결이 든 요소를 실무 언어로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 마신 술의 양과 마신 속도, 평소 주량
- CCTV나 목격자 진술로 확인되는 걸음걸이와 말, 행동
- 두 사람의 관계와 만남의 경위
- 사건 전후에 주고받은 메시지와 통화
결국 그날 밤의 기록이 진술보다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술집을 나와 혼자 계단을 오르는 장면, 고소인이 직접 결제한 내역, 택시를 부르고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는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였다는 자료가 됩니다. 반대로 부축을 받아 이동하는 장면이나 대화가 끊긴 기록은 불리하게 쓰입니다.
고소가 며칠, 몇 달 늦게 들어왔다는 사정도 그 자체로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늦어진 경위와 그 사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연락은 신빙성을 따지는 자료가 됩니다. 대화방을 정리하거나 나가기 전에 원본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 기억도 흐릴 때
피의자도 많이 마셔 기억이 끊긴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때 빈 구간을 추측으로 채우면 진술 전체의 신빙성이 흔들립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과 직접 기억하는 사실을 나눠 말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도 어느 구간이 그런지 특정해서 말해야 설득력이 생깁니다. 그리고 숙박업소나 주변 상가 CCTV처럼 지워지기 쉬운 자료는 연락을 받은 직후에 확인해야 합니다.
죄명에 따라 무게도 크게 다릅니다. 준강간은 3년 이상의 유기징역, 준유사강간은 2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벌금형이 없고, 준강제추행은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입니다. 간음이 있었는지, 신체 접촉에 그쳤는지를 첫 진술에서 정확히 말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를 알려 드리기 위한 것으로, 개별 사건에 대한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 사건마다 사정이 다르니 상담을 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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